“애물단지였다. 관에서 관리하는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는 봉진(封進)의 수량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관은 민가에 있는 나무를 조사해 관리했다. 봄에 열매를 맺으면 그 수를 헤아리고 장부에 기록했다가 수확철인 가을에 장부와 대조하며 거둬들였다. 그 사이 병해충이나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지면 그 소유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지금은 제주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는 제주감귤에 얽힌 아픈 이야기다. 때문에 백성들은 감귤나무 뿌리를 잘라 말려 죽이거나 펄펄 끓인 물을 끼얹어 고사시키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관에서 감귤을 재배했던 과원 이름을 감귤향기 전혀 없는 ‘금물과원(禁物果園)’이라고 했을까.
▲감귤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 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백제 문주왕 2년(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로 감귤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태종때는 공부제(貢賦制ː지방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실시하면서 감귤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조선 명종 이후부터는 제주도에서 황감(黃柑), 즉 감귤이 진상된 것을 기념해 과거를 치르기도 했다. 이것이 황감제(黃柑製)다. 감귤이 올라오면 먼저 종묘에 바친 뒤 신하들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눠줬다. 나라에서 학생들을 우대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도 황감제 모습이 나왔다.
개량감귤은 1911년 프랑스 신부 에스마일 타켓(한국명 엄탁가)이 일본으로부터 온주밀감 15그루를 기증받아 심은 것이 효시다. 그래서 올해 ‘감귤 재배 100년’은 ‘온주밀감 도입 100년’이지 ‘제주 감귤 100년’은 아니다.
▲북한 어린이에게 비타민C를 공급한다는 취지에서 지원해온 제주 감귤의 상당량이 노동당 간부와 고위층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물로 전용된 것이 우리 관계당국에 포착됐다고 중앙일보가 6일자로 보도했다.
제주 출신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제주도의 대북 감귤지원을 위한 남북협력기금 지원 요청을 거부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통을 주는 나무’ ‘대학나무’로 제주도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제주 감귤에 또 하나의 역사가 담겨지게 됐다.